외국어단기완성의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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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 학습을 마음먹은 한국인에게 동기와 관계없이 공통되는 유혹이 있다. "바짝 어느 정도만 하면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어느 정도는 그의 상식에 따라 3개월에서 1년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것 같다. 시험 점수가 구체적인 목표인 경우는 3개월 완성류가 많고 의사소통이 목적인 경우에는 1년완성류가 많아 보이기는 하지만 공통점은 "바짝"과 "해를 넘기지 않는 기간"이라는 부분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자. 한때 일본어 과외 시장에 뛰어들까 싶어 과외연결사이트에 들어간 적이 있다. 일본어는 영어와 달리 승진/진급/진학 기타 등등에 유용하지 않다 보니 학습자들이 돈을 많이 투자하길 꺼린다. 그 낮은 시세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두 배를 부르는 학습자가 있었다. 수상쩍지 않은가? 들어가 보니, 한다는 말이, 자신은 이제 막 히라가나를 외웠고 가타가나를 외우는 중인데, 연말에 있을 JLPT 시험에서 1급을 통과하고 싶단다. 정말 바짝! 열심히! 할 자신이 있고 자신은 진심이니 그 열의에 호응할 수 잇는 분만 원한다고 했다. 그 때가 2월이었나 3월이었나.... 장담하건대 그는 과외선생을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월 100만원 불렀으면 내가 뛰어들었을까...? 그때는 돈이 없었으니 했을지도 몰라)

내 일본어 학습 이력을 되짚어 보면, 저런 '바짝 단기간'류의 성공사례로 착각할 수도 있다. 04년 8월에 일본어 학원을 등록해서, 문법상급반을 한 달 듣고, 다시 원어민 회화반을 몇 개월인가 듣고, 1년간 통번역학원을 다니고, 1년간 일본에 유학가서 전문학교를 다니고, 다시 반년간 통번대를 다니다가 그만둠. 도합 3년. 이게 공식적인 내 일본어학습이력이다. 시작할 때 나는 일본어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1년 반 후 05년 말에 JLPT 1급을 땄다. 3년 후 08년 말에는 제2언어 수준으로 올라갔다. 자, 3년만 하면 나도 일본어 전문가! 일 것 같은가? 개소리.

저 3년간 난 문자 그대로 일본어만 학습했다. 하루 10시간 이상씩. 내 인생에서 그렇게 토나오게 외국어를 판 기간은 그 외에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지도 모른다. 섀도잉, 읽기, 단어외우기, 받아적기.... 진짜 목과 손이 아팠다. 그리고 저 학습 이전에 2년 정도 대량의 영상물을 보며 일본어 음성에 노출되었던 기간이 있다. 그러니까 실제로 내가 일본어를 잘 한다는 소리를 듣기까지 인텐시브 코스로 5년이 들어갔고 그 기간 들어간 돈은 계산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히라가나에서 시작해서 10개월 안에 JLPT 1급? "본인이 어학학습의 천재+하루에 10시간 이상 매일매일 학습할 자신이 있음+훌륭한 지도자가 있음"의 삼박자를 갖춰도 가능성이 꽤 낮아보인다. 아, 시험만 통과해도 되는 거면 조금 더 가능성이 늘어나나?

내가 한 경험을 비추어 보건대 새로 시작하면서 1년 안에 전방위로 써먹을 만한 수준의 외국어 학습을 달성하는 건 불가능하다. (같은 어족이거나 접촉이 심해서 어휘습득의 이점이 있는 경우는 제외하자) 더 쉽게 바꿔 말하면 영어 처음 하는데 1년만에 토익 800점대 달성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저런 유혹에 빠진다. 특히 본인이 많이 실패해본 영어 말고, 제2외국어를 학습할 때.

예전에는 그런 욕심을 볼 때마다 상당히 짜증을 냈는데, 요즘 내 심경을 관찰해보니 이게 그렇게 욕할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저 위의 어이없는 사례도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제2외국어 학습을 갑자기 열렬히 원하는 동기는 하나밖에 없다. 진학이나 승진, 취업 등 실용적인 이유로 필요해진 경우. 한국의 교육제도 안에서 학생이 꾸준히 제2외국어에 흥미 유지하기란 어렵고, 그러므로 고등학교 졸업 이후의 인생에서, 어느날 갑자기, 제2외국어를 잘 구사하면 무엇무엇을 얻을 수 있다, 는 선택지가 주어진다. 그 시점에서 인생의 속도가 얼마나 빠르냐 말이다. 2, 3년 뒤를 바라보며 학습해나갈 진득한 사람이 한국인 가운데 얼마나 되겠나. 당장 1년 뒤에 뭘 할지도 몰라서 전전긍긍하는 판에, 제2외국어를 배워서 3년 뒤에 이런 일을 하겠다, 라고 생각하며 지금을 꾸준히 투자할 만큼 미래에 확신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즉, 미래에 대한 불안이 기다릴 수 있는 여유를 뺏고 빨리빨리를 외치게 만든다. 이것은 전방위에서 벌어지는 일이며, '외국어 단기간 완성'의 욕심은 이것이 발현된 현상에 불과하다. 아, 물론 여기에 현실적인 문제도 끼어든다. 외국어 학습에는 돈이 든다. 시간과 돈을 적게 들이고 지금 당장 '외국어 구사 스킬'을 갖고 싶다, 라는 마음이 생긴다는 건데, 아, 막상 내가 이런 마음에 젖어 있는 걸 보니 참으로 추하다.

독일어학습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주로 예술 계통에서 '독일어 해야 되는데 하나도 모르는데 얼마나 해야 되요?'라는 질문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독일어가 진학을 위한 '수단'일 뿐인 학습자가 많은 모양이다. 괴테인스티투트의 까칠한 태도는 다년간 그런 학습자를 상대하면서 쌓인 것일지도. 그리고 내가 지금 그런 학습자이다 보니 거기에 대해 뭐라 할 처지가 아닌 것 같다. 자경문 삼아 적어 둔다. 외국어스킬은 외국어를 사용한 시간에 비례함을 명심하자.

-- saltpeanuts 2012. 1. 11

사실 한국인들만이 이러한 "빨리빨리"에 시달리는 건 아니다. "내가 XXX를 지금부터 시작해서 몇달, 혹은 1년정도 지나면 좀 할 수 있게 될까?" 같은 질문은 전세계 제2외국어 학습자들에게 공통된 것 같다. 심지어 language geek들 사이에서도.

다만 한국인들에게서 더 많이 눈에 띄는 현상은 "완벽주의"이다. Kaff가 온/오프라인에서 한국인과 그 외 (주로 북미/유럽계) 출신 학습자들을 만나본 걸 보면 북미나 유럽계가 기초도 되먹잖은 상태에서 음성채팅이니 원서니 하고 뭉개면서 자뻑하고 정확히 이해도 안 되면서 대강의 요지gist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떠드는 데 비해 한국계들은 어째 교재만 무섭게 레벨을 올려가며 그 언어 안으로 뛰어드는plunge 걸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Old:실력이안오른다에서도 적었지만 많이 공부한 영어는 이미 대부분 학습자들이 plateau에 올라와 있기 때문에 단기속성 따위를 믿지 않지만 제2외국어는 백지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단기속성의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기속성은 목표를 좁게 ("낮게"가 아니다) 잡을수록 가능성이 올라간다. 막연한 속성은 없다. -- Kaff

see also Old:얼마나배워야할것인가 , Old:독학으로외국어익히기 어떤언어를배워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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