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계획과시작의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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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읽으면 좋습니다: [http]다이어터 46화

작년, 학기를 마치고, 12월 25일에 기말보고서를 제출하고, 12월 30일에 교환학생 지원 밑작업을 마쳤다. 그 와중에 일에도 한 다리 걸쳐놓았고, 호의로 대해줄 것이라고 신뢰할 수 있는 분들께 기말보고서에 대한 조언도 부탁드렸다. 12월 29일에는 성적이 모두 떴다. 던져놓은 이메일들은 어차피 1월 초순이 넘어가기 전까지는 답이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그러므로 2011년 2학기는 끝났어야 했다. 문제는, 2012년이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숫자로 이름을 붙이는 것, 무의미하다.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다보면 하고 싶은 일 목록과 해야 하는 일 목록이 주르륵 작성되게 마련이고, 오늘이 며칠이냐에 관계없이 목록에 적힌 일들을 하나씩 처리해 감이 마땅하다. 일이 하나 끝났으면, 다음 일을 시작해야 한다. 쉬어야 할 것 같으면 쉴 수도 있지만, 해야 하는데, 를 되뇌이면서 미적거리는 건 바보짓이다.

바보짓인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보내놓은 이메일들이 신경쓰이고, 날은 춥고, 새로 시작해야 하는 일의 귀찮음이 예상되는 가운데, 늪에 발목이 빠졌다. 이불 속에서 기어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ㅠ_ㅠ 나는 아이패드와 무협지와 만화책을 붙들고 하릴없이 이불속에서 시간을 보냈다. 수시로 이메일을 확인하면서. (그러라고 산 아이패드가 아닐텐데! orz)

중간에 기어나오려고 시도도 많이 했고, 부분적 성공과 부분적 실패가 혼합되는 나날을 주로 보내면서 어느덧 2주가 지났다. 그 2주간 가장 괴로웠던 것은 해야 할 일을 지금 하고 있지 않다는 것. 그 해야 할 일이 그렇게 어렵지도 않고,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이불 속에서라도 할 수 있는 일인데도.

  • 학위논문용 law data 처리. 수백개의 파일을 열어서 '뵈/뵙'을 하염없이 검색하며 용례를 모으고 분류하는 일이다.
  • 독일어, 특히 아시밀.

겨우 두 개 뿐이다. 이번 방학때는 일이 들어오지 않았다. 돈 걱정도 있긴 했지만, 어차피 지원해놓은 일 쪽에서 거절의 연락이 오지 않는 한 다른 일을 시작하기도 어려웠다. 그냥 이메일들을 기다리면서 해도 되는 일이다. 그런데 이주일간 이메일을 기다리면서 이것들을 하지 못했다. 아니, 대체 왜? 왜, 저 이메일을 기다려야 했던 걸까? 단순히 내가 게을러서인가?

동기를 따지자면 1. 기말보고서에 대한 조언을 받고서 이후 연구계획을 조정할지 밀고 나갈지 판단하고 싶었다. 2. 교환학생 관련 연락을 받고서 다음 학기 목표를 졸업으로 하느냐 수료로 하느냐를 판단하고 싶었다. 3. 일 관련 연락을 받고서 1월/2월 시간운용을 가늠하고 싶었다.

신년의 계획을 세우기에는 변수가 많다 보니, 변수를 줄이고 싶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추진할 수 있는 계획을 알고 있다. 위에 적어놓은 두 가지를 하면 된다. 졸업을 하기는 어려워도 미루기는 어려우며, 어학은 어차피 단기간에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지금부터 꾸준히 해 두어야 한다. 즉, 작년에 예상했던 대로 졸업과 독일유학 준비를 하면 된다. 그 와중에 일본은 들러가면 좋지만 못 가면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잘라먹지 못한 것은, 아마도 돈에 대한 내 조바심 탓일 거다. 일본 교환학생 떨어지고 졸업을 이번에 노려서 무사히 한다고 하자, 그럼 올해 하반기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1. 독일어권 대학에 무사히 박사과정으로 지원할 수 있을 것인가? 2. 지원한다고 했을 때 재정문제는? 장학금은?

이에 관하여 다시 독일어 문제가 생기는데, 독일어 공부를 이제 내가 한다고 해도, 정말 여름에 C1 통과할 만큼 할 수 있을까? 내가 내 게으름을 아는데? 여기서도 돈이 있으면, 안전한 선택이 있다. [http]괴테를 이용하면 된다. "51만원*2회 + 47만원*6회 = 384만원"과 "주4회 오전*8개월"을 지금부터 털어넣으면 9월 말에 B2까지 클리어할 수 있고, 공부를 좀 더 해서 연말이나 내년 상반기에 시험을 치면 된다. 독일어 못하는 자를 상병신으로 만드는 괴테인스티투트 특유의 분위기 안에서 공부 안 하기란 쉽지 않으니 들인 돈만큼의 어학 실력을 갖출 수 있을 터이다. 그런데 일단 돈이 없거니와, 그렇게 상병신취급받으며 도발당하지 않으면 공부를 안할만큼 내가 의지가 박약하단 말인가? 정녕 독학은 안 되는가?

이 불안을 떨치는 시나리오가 몇 가지 있는데, 1. 일본 교환학생에 붙는다 2. 독일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여름에 C1을 딴다 + 가고 싶은 전공과 지도교수를 찾아낼 수 있을 만큼 전공 공부도 열심히 한다, 이 두 가지다. 어느 쪽이든 실현되면 하반기에 할 일이 생긴다. 백수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둘 중 어느 쪽이 덜 무서운지는 명백하다. 그러므로, 지금 변수와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일이 2안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1안을 기웃기웃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아, 약한 마음이여.

돌이켜보건대 내 지난 2주간의 머뭇거림은 백수가 될 하반기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모양이다. 더 정확히는, '한다고 했는데도 하반기에 결국 백수가 되면 어떻게 하지?'라는 두려움. 이건 정말 고약하다. 왜냐하면, 하지 않으면 '안 했으니까 백수가 되었다' 라는 변명이 생기기 때문이다. 노력하는 게 두려운 거다. 노력했는데도 안 될까봐.

(이 문단을 쓰고 깨달았다. 왜 내가 오늘 갑자기 내 미적거림에 대해 분노하고 분석하기에 이르렀는가에 대하여. 오랜만에 꺼내읽은 「사회과학자의 글쓰기」에 이와 같은 현상이 나온다. 나쁜 평가가 두려워서 아예 쓰지 못하는 것. 그렇군, 현상은 달라도 원리는 같았군.)

내가 왜 이러는지 알았어도 여전히 두렵기는 하다. 하지만 원인이 이렇다는 것을 알고서도 계속 미적거릴 만큼 내가 자존심이 없지는 않다. 오늘 발작적으로 괴테를 뛰어갔다왔다. 오전에 수업을 하는 독일어학원에 등록하여 일단 아침을 공부하면서 시작할 요량이었는데, 2008년에 들었던 A.1.1은 이미 유효기간이 끝났으니 새로 시작하든가 반편성시험을 치라는 소리를 들었다. 어차피 새로 시작해야 한다면 학비가 20만원쯤 싼 [http]훔볼트독일문화평생교육원에 가볼까 생각중이다. 세상은 의지박약을 기다려주지 않으니, 혼자서 시작할 수 없다면 도움이라도 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

(덧. 1월 11일 현재 내가 보낸 네 통의 이메일은 모두 답장이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전부 거절당한 것으로 생각하고 계획을 짜는 게 좋을 것 같다.)

-- saltpeanuts 2012.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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