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제도는누가지배하는가에서 이어지는 글이다. 음.. 원래 나누려 했다가, 합치려 했다가 결국 너무 길어지게 되니 나누기로 한 글이다.
중학교 영어교과서는 정직하게 학교에서 (서울시교육청이 지하철 광고에서 떠드는) "제철학습"을 기준을로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1학기 중간고사에는 인사말과 나이스 투 밋 유 등이 나오게 된다. 내신교과서는 학년이 올라가며 다소 난이도가 어려워지고, 학생에 따라서는 기초실력이 모자라는 학생들은 이 학년 사이의 갭을 부담스러워하는 학생들도 존재한다. 공립 초등학교 영어교육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모르긴 하지만, 중1을 너무 쉽게 시작하기 때문에 난이도가 가파르게 올라가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초등학교 때 배우는 영어와 연계가 안 되어 있는 걸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이른바 "영어학원"들은 내신에 대해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형학원들 중에는 아예 "우리는 내신학원이 아닙니다'라고 딱 잘라 말하는 곳들도 있었다. 내신 수준도 힘들어할 정도면 아예 우리학원 올 생각도 말라는 것도 있고, 그런 걸 하고 있느니 차라리 우리학원에서 영어 자체의 기본기를 닦아라, 라는 뜻이기도 하다. 음, 뭐, 기본실력을 충실히 닦는 게 중요하다는 것 까지는 원론적으로 동의한다.
그게 2000년대 중후반까지의 일이다. 외고에 입시하기 위해 영어 공인인증시험을 보거나 외고 자체 듣기평가 시험 따위를 준비하던 시절에는 학교에서의 영어내신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외고가 원하는 영어실력은 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을 요구했다. 즉 이 시기는 성실하게 "제철학습" 한 학생들이 중학교 졸업시점에서 가질 수 있는 영어실력으로 외고는 꿈도 꿀 수 없는 시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교육제도는 계속 변했다. 그것도 조금씩 바꿔가는 게 아니라 방향이 완전히 왔다갔다 한다. (그리고 관련자 모두를 황당하게 한다) 아예 외고입시에서 공인시험이나 외고 자체의 입학시험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고 학교 내신 영어성적과 면접만으로 대체한 것이다.
영어는 과목 특성상 선행학습이 무한정 일어날 수 있는 과목이다. 고급독해나 글쓰기가 요구하는 사고능력이 없더라도 "언어" 자체는 어린 아이들에게도 오히려 더 쉽게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고, 어려서부터 그걸 해 온 학생들과 해오지 않은 학생들 사이에는 중학교 들어올 무렵쯤 되면 안 해온 학생들이 치고 올라가기가 굉장히 힘든 수준의 격차가 발생한다. 초등부를 주 대상으로 하는 일부 학원들이 "영어는 초등학교때 끝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토플 주니어 같은 걸로 훈련시켜 놓으면 중학교때 실제 토플이나 텝스를 본격적으로 준비할 실력이 갖춰지기 때문이다.
자, 그래서, 중학교 2학년에 텝스 800점 정도의 성적이 나오는 학생이 있다고 하자. 이런 학생들이 "많다"라고는 하지 않겠지만 어쨌건 실제로 "꽤" 존재한다. 옛날같았으면 사교육의 혜택을 받은 이런 학생들이 외고를 점령했겠지만 지금은 모두에게 기회를 균등히 주자는 의미에서 외고입시가 내신만으로 결정되는 시대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이 학생도 때가 되면 다시 내신수준의 영어로 내려와서 공부해야 한다. 그러면 그렇게 못 하는 평범한 학생들은? 물론 똑같이 내신수준의 영어로 공부한다.
자, 교과서의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 대부분 영어학원들의 내신 FM은 다음과 같다: 1. 교과서에 등장하는 단어는 전부 암기한다. 2. 교과서의 지문을 전부 암기한다. 3. 문제를 열라 푼다. 교과서 2-3과 정도 분량의 시험범위가 정해지는 이상 그 안에서 낼 문제가 얼마나 되겠는가? 한 1,000문제쯤 풀다 보면 인간의 머리로 상상이 가능한 거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게 된다. (영어선생님들도 그 좁은 범위 안에서 매년 다른 문제 내느라고 고생이 많으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내신은 상대평가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1등급은 상위 4%까지, 2등급은 11%까지로 매겨진다. 즉 100명이 있다면 4명이 1등급을 가져가고 7명이 2등급을 가져가게 된다. 그런데 100명 중 만점자가 5명이 있다면? 이렇게 동석차가 발생할 시 100점을 받은 5명은 전부 5등이 되고, 전원 2등급을 받게 된다. 그러면 하나 틀려서 97점을 받은 동석차가 7명 있다면 이들은 전부 12등이 되고, 전원 3등급을 받게 된다. 학생들을 가능한 한 점수대를 구분해 이런 일들을 없애기 위해 요즘 시험지 중에는 소수점 단위 배점이 미묘하게 다르게 배치되고, 100점의 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한 함정문제들이 출제된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하나정도는 틀리도록, 그리고 그 하나도 하나는 2.5점이지만 다른 하나는 3.3점이라 두 사람의 석차를 구분할 수 있도록, 이런 식. 그리고 서술형을 늘리라는 교육부의 권고도 여기에 한몫했다.
실제로 경기도 G시 B중학교 시험지에서 본 유형의 문제를 예로 들어보면, 교과서 본문 중 두 문단 정도가 지문으로 나왔고, 중간에 아무데나 구멍을 뚫어서 채우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서 이런 문제가 5점 서술형으로 나왔다. 이 구멍중에 관사가 있는데 a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the를 쓴 한 학생은 부분점수도 없이 5점 전부를 깎였다. 학교마다, 선생님마다 이런 "부분점수"에 대한 정책이 다르지만 이런 관사의 사용정도가 아니라 구두점의 사용에서 부분점수도 없이 5점, 7점짜리 문제를 그어버리는 사례들도 있었다. (의문문에 물음표 안 썼다고!)
같은 B중학교의 또다른 특징 중 하나는 교과서 외 교사재량으로 주는 프린트물이 많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프린트들은 하나같이 교과서보다 어렵다. 교과서 본문들보다 길고 어려운 프린트를 받아쥐고 "그냥 해석해봐" 하는 식으로 나눠준 다음에 시험문제 내는 게 공정한가? 그걸로 수업이라도 하는 교사는 그래도 양심적인 편이다. 최소한 학원을 안, 혹은 못 다니는 학생들에게도 이게 무슨 내용인지 정도는 알 기회를 주는 거니까. 하지만 그렇게조차도 하지 않고 그냥 20장쯤 뿌려버린 다음에 그 중에서 랜덤하게 출제하는 것이다. 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은 거기에 대한 대비를 받지만 안 다니는, 그리고 선행학습을 안 해봐서 그냥 학교 수준에 맞는 학생들은 여기에 제대로 대비할 수 없다.
시험지의 문제 자체를 영어로 주는 학교도 있다. "What can be inferred from the passage?" 라고 되어 있는데, infer라는 말은 내신범위에 없는 단어이다. 근데 본문도 아니고 지시문에 나오면? infer라는 단어는 학원을 많이 다닌 학생들에겐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단어이겠지만 학원을 안 다닌 학생이라면 모를 수도 있는 단어다.
공립학교에서 일하시는 분들의 의견은 다를 수도 있겠고, 또 학생들이 학교에선 학원 욕하고 학원에선 학교 욕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_-) 학교에서 가르쳐 준 것도 안 가르쳐 줬다고 우기거나, 지가 그거 가르쳐 주는 동안 쳐자놓고 모른다고 학원에 매달리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사교육쪽의 공통적인 의견은 학교들이 의도적으로 100점수를 줄이고자 한다는 점인데, 동시에 사교육쪽의 공통적인 목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학원 학생들의 100점수를 늘리는 것 아니겠는가. (허허허.)
악순환이 시작된다. 내신문제들은 그 한정된 범위 안에서 가능한 한 어려워지고, 치사해지고, 꼬여진다. 학원들은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 더, 더, 더 빡센 내신수업을 시키고 더 철저히 본문을 암기시키고 더 많은 문제를 풀게 한다. 그러면 학교들은 여기에 계속 대응한다.
TheRedQueen에 등장하는 군비경쟁이 떠오른다.
최종적인 피해자는 그럼 누구일까?
학생들이다.
-- Kaff
(이 글은 영어학원 강사로서의 경험에 기반한 것이고, 수학쪽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모르긴 하지만 애들 말 들어보면 더하면 더하지 큰 차이 없어 보인다. 내신준비 하는 2-3주간 네자리수로 문제 풀리는 건 영어학원이나 수학학원이나 마찬가지라 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