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는자와배우는자의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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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라는 관계가 생겨났을 때, 이 관계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으며, 각각의 해석은 어떤 행동을 낳을까.

일회적 관계


비호의적 관계와 호의적 관계로 나뉠 수 있다. 두 해석의 경계가 흐려지는 일이 발생하나 일회적이기 때문에 순간의 기분나쁨 또는 곤란함 정도로 끝난다. 다만 이 순간의 길이는 경우에 따라 1분부터 몇 년까지 다양하다. 일회적 관계는 대개 양 당사자 모두 그 관계를 기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관계가 해소되면 그걸로 끝인 경우가 대부분이나 세상은 좁기 때문에 먼 훗날 이것을 빌미로 관계가 부활하는 경우도 있다.

  • 비호의적 관계
    가르치는 자는 가르침의 대가로 배운 자에게 유형의 대가를 요구한다. 배우는 자는 가르치는 자에게 대개 감사의 마음을 갖지 않거나 가지더라도 빨리 사라진다. 배운 자가 자신의 배움을 남에게 무상으로 전수하는 일 또한 대개 없다.

  • 호의적 관계
    가르치는 자가 자신의 가르침에 대가를 받을 마음이 없다. 배우는 자는 가르치는 자에게 고마워하며, 말로 감사하다고 하는 것부터 사소한 (자판기 커피 한 잔부터 식사 한 끼까지 다양한) 성의표시를 하는 것까지 다양한 반응을 할 수 있다. 배운 자가 자신의 배움을 또다른 남에게 무상으로 가르치면 더더욱 훈훈한 관계가 된다.

지속적 관계


사제관계, 장인-도제관계, 계약관계, 의무관계가 있다. 장인-도제관계가 계약관계에 결합하면 갑을관계가 되고 (사실상) 의무관계에 결합하면 주인-노예관계가 되나, 이것들은 가르치는 자가 갖는 영향력의 범위와 배우는 자가 거부할 수 있는 범위의 정도 차이일 뿐이기 때문에 따로 항목을 나눌 필요는 없다. 일회적 관계와의 차이는, 지속적 관계는 해소된 이후에도 양 당사자간의 관계가 형태를 바꾸어 지속된다는 점이다.

  • 사제관계
    가르치는 사람은 대개 진선미 중 하나, 즉 인간이 도달하기 힘든 외부적 가치를 추구하며, 배우는 사람 역시 같은 가치를 추구한다. 제자는 스승에게 그간 탐사된 길 및 미답지에서 길을 개척하는 방법을 배우기를 기대한다. 제자는 추구하는 가치에 도달하는 길을 스승의 도움을 받아 걸으며, 혼자서 길을 개척할 능력이 생겼다고 판단되면 수직적 사제관계가 해소되고 수평적 관계인 도반이 된다. (그렇다고 스승과 맞먹으려 드는 개념없는 제자는 없겠지만. 이 관계에서 스승은 제자의 정신세계를 재형성시켜준다는 점에서 제2의 어버이라 할 수 있다. 죽을 때까지 존경하게 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스승의 지도는 제가가 어디에 와 있고 어디를 향하는지를 파악하여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제자에게 알려주는 것이며, 제자의 학습은 그러한 조언을 참고하여 도전하고 실패하여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자신의 길을 찾는 것이다. (스승이 하라는 대로만 하는 제자는 십중팔구 추구하는 가치에 다다를 수 없고 혼자 걸을 수 있다는 인정 또한 받지 못한다.) 현대 한국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사제관계는 90년대 신무협에 나오는 정파무림의 사제관계이다. (80년대 및 그 이전 무협은 인간관계가 아니라 주인공의 액션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적절하지 않다.) 사제관계의 성립은 스승 쪽에 결정권이 있으며, 추구하는 가치가 맞아야 하는 것은 물론 스승될 자와 제자될 자의 가치관 및 성향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초반 진입 장벽이 높다. 요즘은 이 관계에서 스승만 따로 떼서 멘토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 장인-도제관계
    가르치는 사람은 전문지식과 경험을 요구하는 일을 하면서 그 일에서 최고가 되기를 추구하며, 배우는 사람이 추구하는 바는 가르치는 사람의 지식과 경험 및 직업적 성공을 위한 장인의 지원이다. 사제관계와의 차이는 장인이 도제에게 직업적 안정을 보장할 것이 기대된다는 점, 그리고 장인처럼 되는 것이 도제의 목표가 되는 일이 많다는 점이다. 도제의 학습은 장인이 하는 일을 도우면서 직접 경험 및 간접 경험을 쌓아 숙련도를 올리고 전문 지식을 체화하는 것이다. 장인은 도제에게 도제의 수준에 맞는 일을 주고 그 결과를 평가함으로써 지도하는데, 그 지도가 얼마나 꾸준히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가는 장인의 마음에 달려 있다. 도제의 성장은 장인이 하는 일 및 그 퀄리티를 얼마나 재현할 수 있는가로 측정된다. 충분한 지식과 경험 및 숙련이 쌓였다고 판단되면 도제는 장인으로 독립할 수도 있고, 장인의 나이 및 그와의 관계에 따라서는 장인의 후계자가 될 수도 있다. 장인은 독립할 때가 된 도제에게 무형적 자산인 장인의 명성을 이용할 것을 허락하는 동시에 일할 곳을 소개하거나 개업 자금을 지원하는 등의 도움을 준다. 따라서 도제의 직업적 성공은 장인에게 좌우되며, 장인에게 내침당한 도제는 해당 업계 내에서 영원히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 도제가 독립하더라도 장인-도제관계는 물리적 거리의 측면에서 해소될 뿐, 정신적/사회적 측면에서는 유지된다. 도제에 대한 장인의 영향력은 업계 내에서 장인 자신의 위치가 유지되는 한 지속된다. 따라서 독립한 도제는 일을 함에 있어서 장인과 직접적인 경쟁을 피하는 것을 도리로 받아들이고 일을 하는 거점을 바꾸거나 창의력을 발휘해 일에 개성을 더하는 것이 권장된다. 현대 한국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장인-도제관계는 만화책 "미스터 초밥왕”에서 봉초밥 사장님과 그 직원들 간의 관계이다. 장인-도제관계의 성립은 장인 쪽에 결정권이 있으며 초반 진입 문턱은 낮되 언제든 장인의 재량으로 취소될 수 있다. 관계의 성립, 지속, 해소 모두가 장인의 재량이며 장인은 그 이유를 밝힐 필요가 없다. 장인-도제관계가 계약관계와 결합할 경우, 배우는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이 관계에 들어가며 추구하는 이익을 바꿈으로써 이 관계를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에서 발주기업-수주기업 간 갑을관계와 비슷한 양상을 띤다. 또한 장인-도제관계가 오래 지속되어서 이 관계가 갑자기 독립이 아닌 방식으로 해소될 경우 도제가 잃을 것이 많을 때, 또는 애초에 도제에게 사정이 있어 장인-도제관계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경우는 사실상 의무관계와 결합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장인의 마음먹기 여하에 따라 주인-노예관계로 변질될 수도 있다.

  • 계약관계
    가르치는 사람은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배우는 사람은 그 전문 지식의 습득을 원한다. 지식을 제공하고 그에 대해 대가를 지불하는 관계이다. 과외같은 사인간의 계약관계는 성립과 해소 모두가 양 당사자에게 자유롭지만 제3자, 예를 들어 교육기관이 낀 계약관계는 성립과 해소가 좀 복잡하다. 대개 가르치는 기간과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 사전에 쌍방합의가 이루어지고, 합의한 내용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그것을 이유로 책임을 물을 수 있다. (가르치는 사람이 합의를 이행하지 않으면 배우는 사람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거나 혹은 다시 가르침을 다시 제공하기를 요구할 수 있고, 배우는 사람이 합의를 이행하지 않으면 가르치는 사람은 그로 인하여 학습이 진행되지 못했더라도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는 등) 계약관계에서 가르치는 사람의 지도는 정해진 양의 지식을 배우는 사람에게 설명하고, 필요하다면 연습이나 훈련 등의 방법을 알려주고 그 성과를 평가하는 것이다.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과제를 수행함으로써 학습한다. 계약관계는 일회적인 경우도 많지만, 전문학교, 기술학원, 대학 등의 고등교육기관에 입학하는 경우 교육기관과 입학자 간의 지속적 계약관계가 성립한다고 볼 것이다. 현대 한국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계약관계는 한국의 사교육이다. 계약관계는 대개 계약기간이 다하면 해소하고, 학습자는 기간 종료와 함께 일종의 지식 보유 인증을 받는 경우가 많다. 계약관계가 해소되면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에 대해 영향력을 잃는다.

  • 의무관계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칠 의사가 없고 배우는 사람은 배울 의사가 없으나 외부적 사정에 의해 강제로 지도와 학습이 요구되는 경우이다. 이 경우 가르치는 사람은 직업적으로 자신이 속한 조직에 의해 가르침을 강요당하며, 학생을 고를 권리가 없거나 적다. 배우는 사람 역시 자신의 사정에 의해 배움을 강요당하며, 선생을 고를 권리가 없거나 적다. 어차피 치러야 하는 일이므로 대개 상대에게 무관심하며 조직에서 요구하는 바를 채우기 위해서만 협력한다. 실제로는 학습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일어나더라도 그 효과가 적다. 배우는 사람이 가르치는 사람에게 감사하거나 존경의 마음을 품기는커녕 증오하는 관계가 되기 쉽다.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관계는 대략 이렇게 여섯가지 정도로 해석될 수 있고 실제로는 몇 가지 타입을 결합해서 해석하게 된다. 주의할 점은, 여기서 사제관계가 우월하고 장인-도제관계가 열등하다는 평가가 나와서는 안 된다. 현대의 학문은 진리를 추구하는 분야도 있지만 지식을 생산하는 것을 중요한 목표로 하는 분야도 많다. 지식 생산은 장인의 일이고, 장인은 의사나 법률가가 그 전문적인 능력으로 인해 존중받고 대접받는 것처럼 전문직업인으로써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 또한 애초에 동양에는 장인-도제관계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위에 적은 사제관계는 서양의 전통 안에서 발전했다고 본다. 동양에 저런 관계가 있었다면 수도하는 선승들 사이에서나 가능했으리라.

문제는, 현실이 이렇게 딱딱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가르치는 사람의 해석과 배우는 사람의 해석이 다른 경우가 많고, 둘째로 양 당사자 모두 일관적이지 않아 어떤 때에는 저렇게 해석하고 어떤 때에는 이렇게 해석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가장 비극적인 경우는 양 당사자간 갈등이 벌어질 때마다 매번 관계를 자기가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여 그에 따른 해결을 주장하는 경우이다. 사람은 일관적이지 않다.

구체적인 사례로 대학원의 지도교수와 지도학생의 예를 들어보자. (애초에 이 모든 고민은 이 관계를 어떻게 인식할 것이며 양 당사자가 상대에게 어떤 반응을 기대할 수 있는가에 대한 saltpeanuts의 고민에서 나온 것이다. 아, 인생.) 우선 이 관계를 해석하는 데 있어 생겨나는 어려움은 다음의 네 가지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온다.

  1. 논문지도라는 관계에 대한 교수의 해석
  2. 논문지도를 하는 교수의 방식
  3. 논문지도라는 관계에 대한 학생의 해석
  4. 논문지도를 받는 방식에 대한 학생의 기대

예를 들어, 교수는 논문지도관계를 장인-도제관계로 해석하는데 학생은 계약관계로 생각한다고 하자. 교수는 학생이 게으르고 의욕이 없고 주도적으로 학습하지 않아 학자의 자질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며, 학생은 교수가 책임을 다하지 않고 게으르며 무능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교수가 계약관계로 해석하는데 학생은 장인-도제관계로 해석한다고 하자. 교수는 학생이 독립적으로 연구할 생각은 안 하고 미성년자처럼 자기 앞가림을 교수가 해주기를 바란다고 생각할 것이며, 학생은 교수가 이미 자리잡은 자의 여유를 자랑하며 학생을 방치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예도 아직 단순하다. 1/2와 3/4가 세트로 움직이는 예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1, 2, 3, 4가 모두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교수가 논문지도관계를 사제관계로 해석하고 스스로를 스승으로 인식하지만 논문지도를 할 때는 장인처럼 행동하며, 그것이 비일관적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거나, 혹은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그렇게 행동하는 근거를 이 관계가 의무적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제자가 될 수 없는 학생을 가르치게 되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도 있다. 좀 더 비관적인 케이스로는 논문지도관계를 의무적 계약관계로 해석하여 지도의 책임은 기간이 다하면 끝나는 일회적인 것으로 인식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장인-도제제도로 해석하여 학생이 졸업한 후에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을 수도 있다. 학생은 스스로를 제자로 인식하면서 실제로는 계약관계의 학습자처럼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를 기대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인식과 행동이 각각 어떤 타입을 따르든 관계없이 졸업 후의 직업적 보장을 지도교수에게 기대하는 사례도 많다. 논문지도관계에서 양자의 관계에 대한 해석과 실제 행동은 사안마다 달라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불일치가 표면적으로는 사제관계로 위장되거나, 혹은 계약관계로 위장된다.

한국의 대학원은 겉모습이 어떻든간에 실질적으로는 장인-도제관계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공계의 사노비 현상은 주인-노예관계로 변질된 케이스이다. 그 정도로 극단적이지 않더라도, 대학원생과 교수 사이의 권력관계는 절대적이고, 이 힘은 교수가 대학원생의 졸업 여부를 판정할 수 있으며 이후 연구자로서 취직하는 데에도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데서 온다. 이 영향력은 인맥에서 오는 힘이기도 하지만 장인의 판단이 곧 업계 내부의 기준으로 작용하기 쉽다는 데서도 온다. 대학원생 혹은 박사초년생이 내놓은 연구의 가치는 지도교수의 평가에 강하게 좌우되고, 대학원생에게 지도교수의 평가에 반박할 방법이 없는 경우도 많다 (그 점에서 이공계는 그나마 다행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방법론이 외부적 기준을 제공하니까.) 장인들끼리의 우열은 내부적 기준보다는 외부적 권위 (권위있는 학술지 게재)에 의해 결정되는 일이 많다. 장인의 후원자 혹은 고객이 누구냐에 따라 업계 내에서 장인의 위치가 움직이는 것과 비슷하다. 같은 업계 종사자로서 동료 장인을 굳이 적으로 돌릴 이유가 없으므로 (잘못하면 둘 중 하나가 낙오될 때까지 싸워야 한다. 위험하다) 상호 비판도 잘 행해지지 않으며, 도제(였던 자)는 장인의 논문을 비판하거나 반박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친분있는 관계에서, 따로, 사담으로 하는 것이 예의에 걸맞다. 공공연하게 비판하면 장인의 위신에 흠이 갈 수도 있고, 그걸 이유로 배신자 취급을 당할 수도 있다. 장인의 위신은 장인이 키운 모든 도제들에게도 중요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장인의 포지션에 선 지도교수의 지도는 절대적으로 지도교수의 마음에 달려 있다. 이유야 어쨌건 마음에 들면 좀 더 신경써서 봐 주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방치해도 된다. 어차피 한국의 대학원에서 지도교수란 행정적으로는 Thesis advisor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지도를 해야 할 의무가 없다. 장인으로 행동할 자유를 제도가 주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대학원생은 속한 조직에서의 의무 때문에 지도교수의 지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대안이 없으며, 따라서 원하지 않아도 도제로서 지도교수의 기분을 맞추고 마음에 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지도교수의 눈에 들면 이번에는 관계가 정진정명 장인-도제관계가 되거나 혹은 사제관계로 발전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대학원생은 그것을 희망으로 버티거나, 혹은 지금까지 한 것을 내던지고 공부를 그만두거나, 혹은 한국을 떠나는 것 중에서 고를 수밖에 없다.

-- saltpeanuts 2012. 1. 14


see also [http]지도교수를 선택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 [http]지도교수를 위한 변명 [http]Nature's guide for men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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